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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주식을 사기 전에 미국을 공부하는 건 기본

 


하루는 문득 해외주식 특히 미국 주식에 투자하겠다면서 정장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뭘 얼마나 알고 있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보험회사 해외사업부에서 일하는 동안 미국의 보험 산업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게 된 것들이야 있지만 그간 사실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제대로 배우거나 알려고 해본 적은 없었다. 미국이라고 하면 맥도날드. 할리우드 영화, NBA, 천조국 등 피상적인 단어들만을 떠올려왔던 것도 그 때문인 듯했다. 그래서 휴가를 내고 삼성역에 있는 별마당 도서관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이책 저책을 뒤지다가 평택대학교 미국학과 손세호 교수의 하룻밤에 읽는 미국사를 읽어보기로 했다.

1) 프런티어로 향하는 미국인들의 운명

 

손세호 교수 역시 미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임에도 정작 미국이라는 나라의 본모습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로 책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간 한국 사람들은 특정 사건 사고를 발단으로 하여 미국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나 적대적인 태도, 즉 다소 극단적이고 편향된 인식을 보여온 듯했다. 심지어 나는 고등학생 때 어느 선생님 한 분이 미국을 두고 제조업은 다 망했고 디즈니랜드나 영화 같은 서비스업으로만 먹고사는 나라라고 폄하하셨던 것을 그대로 믿기까지 했다. 그러나 늦게나마 하룻밤에 읽는 미국사를 읽으며 나는 미국의 주요 리더들을 따라가는 그들의 역사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프레더릭 잭슨 터너의 프런티어 가설이었다. 프런티어는 회사들이 프런티어 정신 등을 이야기하며 상업적으로도 사용하는 단어지만 실은 지정학적 지역을 묘사하는 보통명사다. 지역적으로 도시화되고 문명화된 사회와 사람이 살지 않는 미개지 사이의 지역, 즉 말 그대로 개척을 필요로 하는 곳이 프런티어인 것이다. 서부 개척이 공식적으로 마무리된 1890년, 미국의 재무장관은 프런티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발표했는데 프레더릭 잭슨 터너의 프런티어 가설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터너는 부패하고 타락한 유럽을 떠난 미국인들은 신대륙에서 목숨을 건 개척을 해나가며 관습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했고, 새로운 제도와 활동을 요구하는 자유를 창조했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프런티어로 가는 과정에서 미국인들은 민주주의 개인주의, 평등주의, 실용주의, 물질주의 등 미국적이라 말할 수 있는 특징들을 창출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터너의 가설은 미국인들이 프런티어가 사라진 미국 본토를 넘어 새로운 프린티어, 즉 해외로 진출해야 하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다. 실제로 19세기 말부터 미국은 중남미부터 시작하여 적극적으로 해외에 진출했다. 그렇게 시작된 미국의 해외 팽창이 미국의 기업가정신과 합쳐지며 지금 한반도에 사는 평범한 나에게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최초의 주식회사에 대해 공부하다

 

해외 주식 투자를 하기 전에 생긴 궁금증 한 가지가 더 있다. 인류 역사 최초의 주식회사는 어느 회사였을까?가 그것이다. 서양의 국가들 중 하나에 세워졌을 듯했는데 검색해 보니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성장에 자극을 받아 회사 이름도 똑같이 지었다. 그러나 영국 동인도회사는 주식회사가 아니었기에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세계 최초의 다국적 회사라는 타이틀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거머쥐게 되었다. 그런데 왜 다른 국가가 아닌 네덜란드였을까? 17세기 네덜란드의 상황을 보자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관의 오랜 전쟁 이후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독립에 막 성공한 후였다. 이후 종교 개혁으로 개신교를 받아들이면서 종교적 관용 정책을 폈기에 프랑스의 위그노전쟁이나 독일을 중심으로 한 30년 전쟁 등의 종교 전쟁을 피해 신교도 및 가톨릭교도들과 유대인 선주, 청어잡이 독일인 어부 등 다양한 이민자들이 이 나라로 모여들었다. 다소 혼란스럽긴 했지만 동시에 풍요를 꿈꿀 수 있는 이러한 상황에서 동인도회사는 탄생했다. 어떤 회사였는지 좀 더 공부해 보기로 했다.

 



1) 동인도회사의 개요

 

1602년 3월 20일: 회사설립,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 정부가 아시아의 향신료 무역에 대해 21년간 독점권을 행사할 수 있는 한시적 회사로 설립되었다. 동방과의 무역을 위해 회사를 세웠다가 무역이 끝나면 회사도 없애던 당시였으므로 사람들은 회사가 21년 이상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1690년 3월 20일: 암스테르담증권거래소설립, 동인도회사 주식의 거래 시작
1660년: 청나라의 영향으로 대중국 무역이 쇠퇴하면서 성장의 정체 시작, 청 왕조의 중국 대륙 통일과 일 인한 해금 정책 그리고 일본산 은의 생산량 급감
1700년: 대륙의 영향에 따른 가격 경쟁력 약화로 내리막길 시작, 영국과 프랑스라는 강력한 경쟁자들이 도전
1798년 12월 31일: 인도를 거점으로 하는 영국 세력에 밀려 해체, 파산

전성기 시절의 동인도회사는 자산으로 150척의 상선, 40척의 군함, 5만명의 직원, 1만명의 군인이 있었다. 군함을 갖고 있었으니 회사를 넘어 국가라 해도 될 만했다.
그렇다면 1609년에 동인도회사의 이름으로 주식이 발행된 배경을 알아보자. 당시 영국, 스페인과의 외교 관계가 무너지면서 돈이 궁해진 네덜란드 상인과 의회는 머리를 쓴다. 네덜란드 부자들과 국민들로부터 십시일반 모아 큰돈을 만들어보자! 라며 구체적인 방법을 위해 머리를 짜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돈을 낸 시민들에게 그들은 동인도회사라고 적힌 종이 증서를 제공했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 최고의 주식이었다.
최초의 주식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암스테르담거래소가 주식 역사상 첫 번째 주식 시장이었던 것은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주식 시장이 15세기에 제노바나 라이프치히 정기 시 및 많은 한자동맹 도시들ㄹ에서 흥성했고 국가 대주거래는 그보다 훨씬 전에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서 흥정의 대상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암스테르담거래소의 새로움은 시장의 거래량과 유동성, 명성, 그리고 거래의 투기적 자유에 있었다. 
동인도회사가 주력했던 무역 상품으로는 향신료, 비단, 각종 차, 커피, 쪽, 콩, 곡물 및 쌀이 있었다. 등인도회사가 전개한 해외 사업의 영향으로 17세기 후반 네덜란드의 해외 투자액은 국내총생산(GDP)의 두 배에 가까운 약 15억 길더에 달했다.
동인도회사는 1602년 초대 주주 모집을 시작한 지 5개월 만에 암스테르담에서만 1,143명의 주주를 모을 수 있었다. 이 회사의 주식에 투자한 투자자들은 배당받았는데. 배당수익률이 나쁘지 않았다. 설립 첫해부터 배당을 시작한 동인도회사가 주주들에게 처음 약속했던 배당 수익은 3.5%였다. 그런데 1602년부터 1696년까지 이 회사가 기록한 평균 배당수익률은 20% 안팎이었다. 특히 설립 4년 차인 1606년에는 무려 75%의 배당수익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동인도회사의 해외 무역 및 주요 거점들

 

다국적 기업이었던 동인도회사는 여러 해외 거점들을 두고 활동했다. 현재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는 옛 지명이 바타비아로 동인도회사의 해외 본사였다. 거주자가 약 2만 7,000명일 정도로 바타비아는 규모가 큰 도시였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노예였다. 이곳은 동인도회사의 해외 주요 거점이었고, 다른 거점들은 사실 동인도회사 선박의 기착지 정도에 불과했다. 바타비아의 주요 산업은 제당이어서 1만 2,000명이 넘는 노예들이 엄청난 노역을 해야 했다. 18세기에는 설탕값이 떨어져 화교 폭동으로 이어졌으며, 화교 대학살이라는 슬픈 역사가 쓰이기도 했다.
이후 반자르마신, 수라바야 등을 추가로 점령한 동인도회사는 수마트라에서 뉴기니에 걸친 거대 해상무역권을 장악했고 향신료, 설탕, 커피 등의 플랜테이션으로 부를 쌓았다. 더불어 메콩강 유역 및 인도차이나반도에도 진출하여 상관을 두었다.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은 아시아로 향하는 동인도회사 선박들이 쉬는 곳이었다. 배들은 이 도시를 거쳐 현재의 스리랑카인 실론 섬의 항구도시 갈래에 기착했다.

 

1640년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이 점령하고 있던 갈래를 손에 넣었다. 갈래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계피 산지였는데, 이로써 시장에서 계피를 독점 공급하는 국가 역시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바뀌었다.
또한 동인도회사는 현재의 대만인 포르모사의 남부를 점령한 뒤 이곳을 중국과 일본 진출의 교두보이자 동북아시아 중계무역의 거점으로 삼았다. 현재의 안핑 지역에 질란디아요새를 건설하여 대만 식민지의 중심으로 정한 이 회사는 대만 남부와 해안 일대를 지배하며 설탕과 차 플랜테이션을 운영하고 사슴 가죽 등을 수출했다.
그리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당시 동인도회사는 조선과의 무역에 대한 관심이 컸다고 한다. 조선 도자기의 가치가 높다는 것을 네덜란드 상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인도회사는 1669년 네덜란드 미들버그에서 길이 약 25미터, 탑승 인원 20명의 1,000톤급 소형 상선을 건조하고 코레아로 명명한 뒤 자카르타로 출항까지 했었다. 그러나 당시 동북아지역의 중개무역 이권을 쥐고 있던 일본 막부가 이 소식을 접하고 나가사키의 움직임에 강력히 대응하고 나섰다. 결국 동인도회사는 조선과의 거래를 포기했고, 코레아호는 조선에 입항도 못한 채 자카르타에서 폐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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